1.


아파트에 남아있는 짐을 정리하고 청소를 했다. 갈수록 짐이 줄어들어서 평범한 SUV 차량에 몽땅 문제없이 실을 수 있었다. 예전엔 두 번 세 번을 힘들게 왔다 갔다 해야 다 옮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사하면서 요령이 많이 생긴 것 같다. 안타깝게도 고양이는 2주 전에 방충망을 뚫고 집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가버렸다. 꼬박 3일 정도 해 질 녘에 찾으러 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비 오는 날 덤불 사이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무래도 고양이를 앞으로 누가 어떻게 어디서 키워야 할지 고민하던 대화를 고양이 앞에서 한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 짐승 앞에서는 말조심해야지.


2.


필요한 것을 사러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목동을 아주 오랜만에 갔다. 백화점을 들렀다가 자주 걷던 길에서 커피를 마셨다. 으음. 사실은 신정동에 아주 맛있는 참치 집이 있다고 해서 친구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는 도중에 물건도 사고 커피도 마셨다. 특별한 이유도 생각도 없다. 그리고.. 변한 것도 없더라. 변한 건 나겠지. 백화점 주위를 꽤 걸었는데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속으로 나는 대단해 막 이럼. 뭘 먹었는지도 생각나니까.


3.


가끔 간단한 일로 서울 시내를 갈 일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학생들이 사용하는 기계를 수리하는 경우다. 1년 2학기 반복적인 작업만 하다 보니까 기계도 수년간 적을 해서 단물이 다 빠졌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군기만 잡으면 되는 것들. 그런 이유로 정릉, 용산 그리고 회기역 근처 대학교를 한 두어 번 갔었다. 예전에는 왜 이런 일이 없었는지. 교내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뒤 테이블의 여대생 3명이 별 같잖은 주제로도 얼마나 까르르 호호호. 하나도 안 웃겼지만 나는 커피 천천히 마심. 뭐가 그리 재미가 있을까.


4.


회기역 쪽에 갔었을 때 잠시 차를 돌려서 그 골목을 갔다. 여전히 주차할 곳 없는, 그래서 오르막 위에 차를 대고 잠깐 후문의 내리막을 그냥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가까이 걸어갔다. 주위도 조금 걸었다. 나는 참말로 미친놈인가.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차로 걸어왔는데. 으음? 여기가 딱지 끊는 데였나? 하하하. 시장님 재선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보태쓰세요.


5.


왜 그만하자고 한 걸까 내가. 그러니까 멋진 저녁 식사와 분위기 있는 호텔을 예약했으니. 기분좋게 따라 들어온 너는 남자친구라는 사람에게 거의 강간을 당할 뻔했어. 나에게 짓눌려있는 네 표정을 보고 내가 짐승 새끼구나. 죽고 싶었다. 그동안 같이 시간을 보내고 음식을 나누고 대화를 하면서 행복했는데.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무자비한 모습을 보이고 나서. 그랬다. 그전까지는 사랑이라는 것이 나는 늘 육체적인 것들이 함께였다. 네가 처음이었어.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 네 시간 허비하게 한 점 정말로 미안하다.


6.


이제는 앞서 말한 장소들도 아련해지지 않을까. 더는 근처를 지나다니지도 않을 거니까. 네가 그랬었나. 시작하는 것도 끝내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너무 부끄럽고 치졸하게 끝냈지만 나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다.



by Drifter 2014. 6. 9. 04:03